진종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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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종은 조선 영조의 넷째 아들이자 정빈 이씨의 아들로, 1719년에 태어나 1728년에 사망했다. 1725년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9세의 어린 나이에 사망하여 정식으로 즉위하지 못했다. 이후 영조는 진종에게 효장의 시호를 내렸고, 그의 부인은 효순왕후로 추존되었다. 진종은 사후 정조에 의해 진종으로 추존되었으며, 대한제국 순종에 의해 소황제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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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진종 - 정조
정조는 조선의 제22대 왕으로, 탕평책 계승, 규장각 설치, 장용영 설치, 신해통공 실시, 수원 화성 건설 등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으며, 47세에 사망하여 건릉에 안장되었다. - 조선 진종 - 효순왕후
효순왕후는 영조의 며느리이자 진종으로 추존된 효장세자의 왕비로, 어린 나이에 결혼했으나 남편의 요절로 과부가 되었고, 현빈으로 책봉되어 영조의 총애를 받다 35세에 사망 후 왕후로 추봉, 소황후로 추숭되었다. - 대한제국의 추존황제 - 정조
정조는 조선의 제22대 왕으로, 탕평책 계승, 규장각 설치, 장용영 설치, 신해통공 실시, 수원 화성 건설 등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으며, 47세에 사망하여 건릉에 안장되었다. - 대한제국의 추존황제 - 태조 (조선)
고려 말 무신으로서 위화도 회군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뛰어난 리더십으로 국가의 기틀을 다졌으나, 왕위 계승 갈등으로 인해 상왕으로 물러났다. - 조선의 추존왕 - 흥선대원군
조선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 종식 후 권력을 장악하여 개혁을 추진했으나, 쇄국정책과 독재적 통치로 비판받았고, 실각 후 재집권을 시도하다 톈진으로 압송, 명성황후 암살 의혹 등 격변기 조선의 대표적 인물로 긍정·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 조선의 추존왕 - 덕종 (조선)
조선 덕종은 세조의 장남이자 성종의 아버지로,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9세에 요절하였으며, 그의 죽음은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여러 논란을 낳았고, 후에 아들 성종의 즉위로 추존되었다.
진종 (조선) | |
---|---|
기본 정보 | |
![]() | |
휘 | 이행 (I Haeng) |
별호 | 효장세자 (Hyojang Seja) |
군호 | 경의군 (Gyeonguigun) |
묘호 | 진종 (Jinjong) |
능호 | 영릉 (Yeongneung) |
위치 |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3-6 |
추존 | 조선국 추존왕 대한제국 추존황제 |
작위 | 조선국 왕세자 |
전임자 | 왕세자 윤 (경종) |
후임자 | 왕세자 선 (사도세자) |
재위 기간 (음력) | 1725년 2월 25일 ~ 1728년 11월 16일 |
출생일 (음력) | 1719년 2월 15일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순화방 창의궁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창경궁 진수당 |
사망일 (음력) | 1728년 11월 16일 |
시호 | 온량예명철문효장소황제 (Onyang Yemyeong Cheolmun Hyojang Sohwangje) |
아버지 | 영조 |
어머니 | 정빈 이씨 |
배우자 | 효순왕후 조씨 |
자녀 | 정조 (양자) |
왕세자 정보 | |
존호 | 효장세자 (Hyojang Seja) |
휘 | 이행 (I Haeng) |
사후 정보 | |
시호 (조선) | 효장세자 (Hyojang Seja) 온량예명철문효장대왕 (Onyang Yemyeong Cheolmun Hyojang Daewang) |
시호 (대한제국) | 온량예명철문효장소황제 (Onyang Yemyeong Cheolmun Hyojang Sohwangje) |
묘호 | 진종 (Jinjong) |
능 | 영릉 (Yeongneung) |
가계 | |
왕가 | 전주 이씨 |
아버지 | 영조 |
어머니 | 정빈 이씨 (생모) 정성왕후 (양모) |
배우자 | 효순왕후 |
자녀 | 정조 (양자) |
종교 | |
종교 | 성리학 |
2. 생애
1719년 영조의 장남이자 둘째 아이로 태어났다. 생모는 함양 이씨 출신의 후궁인 궁녀 이씨 부인이었다.[1]
1720년 숙종이 사망하고 경종이 즉위했으나 자식이 없어, 이복 동생인 연잉군(훗날의 영조)이 왕세제로 임명되었다. 1724년 경종이 사망하고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하면서 경의군에 봉해졌다. 1725년에는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726년, 영조는 풍양 조씨를 세자빈으로 간택했다. 그러나 1728년, 창경궁에서 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궁녀들이 연루된 독살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사망 후 영조는 이행에게 '효장'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훗날 효순왕후로 추존된 세자빈은 20년 이상 더 살았으며, 사후 이행과 함께 경기도 파주 삼릉 지구의 영릉에 합장되었다.[2] 이복 동생 장헌세자의 아들 정조가 효장세자의 양자가 되었고, 정조는 즉위 후 진종의 묘호를 추존하였다. 1899년에는 고종이 소황제의 시호로 추존했다.
2. 1. 탄생과 가계
1719년(숙종 45년) 2월 15일, 한성부 북부 순화방(順化坊)의 창의궁(彰義宮)에서 숙종의 넷째 아들인 왕자 연잉군과 첩실 정빈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행(緈)이며 아명은 만복(萬福)이다. 숙종의 첫 손자이자, 숙종 생전에 태어난 유일한 손자이기도 했다.어머니 정빈 이씨는 동궁전 나인으로 있다가 연잉군의 첩이 되었고, 1721년(경종 1년) 연잉군이 왕세제에 책봉되면서 소훈에 봉해졌으나 같은 해 11월 사망하였다.
1724년(영조 즉위년) 아버지 영조가 즉위하자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졌으며, 1725년(영조 1년) 2월 25일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3월 20일에 창덕궁 인정전에서 책봉례를 행하였다.[5]
1726년, 영조는 조문명의 외동딸이자 조현명의 조카인 풍양 조씨를 세자빈으로 선택했다.
- 아버지: 영조
- 어머니: 정빈 이씨(1694년 - 1721년) - 증 좌찬성 이준철의 딸
- 이복 누나: 화억옹주(1717년 - 1718년)
- 이복 여동생: 화순옹주(1720년 - 1758년) - 월성위 김한신 부인
- 정비: 효순왕후 조씨(1716년 - 1751년) - 풍릉부원군 조문명의 딸
- 양자: 정조 - 혈연관계로는 조카에 해당함
2. 2. 세자 책봉과 교육
1724년 아버지 영조가 즉위하면서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졌다. 1725년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726년에는 7세의 나이로 효순왕후 조씨와 결혼했다. 1725년(영조 1년) 5월 부스럼을 앓았으나[6] 이후 부스럼이 낫자, 영조는 세자의 병이 회복된 것을 기뻐하며 종묘에 알리고 사령을 반포하여 대역죄와 강상죄 이하의 잡범들을 사면하고 관리들의 관직을 한 등급씩 높여주었다.[7]1727년(영조 3년) 문묘에 알성한 뒤 태학에 입학하였다. 1727년(영조 3년) 3월 3일, 왕명으로 대제학 이의현을 세자빈객으로 삼았고, 3월 9일 경연에서 입학례를 올렸다. 같은 해 9월 9일 인정전에서 관례를 행하였으며, 9월 29일 조문명의 딸 조씨(효순왕후)와 가례를 올렸다. 그해 11월 세자빈 조씨가 홍역을 앓게 되자 경춘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2. 3. 최후
1728년(영조 4년) 11월 16일, 창경궁 진수당에서 열병과 안질환 등의 합병증으로 훙서하였다.[8] 영조는 친히 그의 임종을 지켰는데, 그는 병석에 누워서도 마지막까지 효를 다하고 가지 못함을 애통해하였다 한다.일설에는 독살설이 제기되었는데, 후일 조사 결과 궁인 순정(順正) 등 궁녀 여럿이 세자와 옹주들에게 독을 쓰고 저주했던 것이 발각되었다. 1728년에 창경궁 자선당에서 사망했다. 향년 9세(만 8세). 아버지 영조는 병상에 누운 세자를 간호했다. 이에 대해 세자는 효도를 다하지 못했다고 슬퍼했다고 한다. 능묘는 경기도파주시에 있는 영릉(永陵)이다. 사후, 비인 효순왕후도 함께 묻혔으며, 현재 함께 잠들어 있다.
2. 4. 독살 의혹
1729년(영조 5년) 3월 9일, 궁인 순정(順正) 등 궁녀 여럿이 세자와 옹주들에게 독을 쓰고 저주했던 사실이 발각되어 영조의 친국을 받고 처참되었다.[10] 궁녀 박순정, 김순혜가 궐밖의 무당 태자 등과 접선, 무당은 과부 이세정으로부터 건네받은 사람의 뼛가루를 창경궁의 양화당, 동궁, 빈궁의 침실 등에 묻었고, 예전부터 그것을 음식에 타서 왕세자와 네 명의 옹주에게 먹였다는 것이다. 이 유골들은 대현산(현, 서울 성동구 금호동)의 여러 무덤에서 채취했거나, 길가에 거적으로 말아놓은 개가 뜯어 먹다만 시체, 혹은 불에 탄 사람의 해골이라 한다.[10]3. 사후
1735년, 영조의 서자이자 진종의 이복 동생인 이선이 태어났다. 1762년,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죽었다.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이 왕위 계승자가 되었으나, 영조는 '죄인의 아들'은 왕위를 계승할 수 없다는 생각에 1764년 2월, 이산을 이미 사망한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켰다.[3]
3. 1. 시호와 능묘
1728년 12월 2일, 당상관 회의에서 시호로 장효(莊孝), 효장(孝章), 장헌(章獻) 셋을 추천했고, 영조는 효가 모든 행동의 으뜸이라는 점을 들어 '효장'을 선택했다. 묘소는 별다른 호칭 없이 효장묘(孝章墓), 사당은 효장묘(孝章廟)로 정해졌다.[9]세자빈 조씨(효순왕후)는 세상을 떠난 후 현빈(賢嬪)으로 봉해졌다. 1751년(영조 27년) 11월 14일, 세자가 죽고 23년 후 창덕궁 건극당(建極黨)의 동실인 의춘헌(宜春軒)에서 승하하였으며, 이듬해 효장세자 묘 왼쪽에 안장되었다.
시신은 한성부 연희궁 근처 북아현에 매장되었다가, 1729년(영조 5년) 경기도 파주군 조리동면(條理洞面) 조리동(條里洞) 을좌(乙坐) 신향(辛向), 순릉 왼쪽 산언덕에 예장되었다. 묘비문은 조문명(趙文命)이 지었으며, 조선국 효장세자묘(朝鮮國 孝章世子墓)라고 쓰여 있다. 이후 왕으로 추존되고, 다시 순종 때 황제로 추존되면서 2개의 비석이 추가로 세워져 그의 묘 앞에는 총 3개의 비석이 있다.[9]
이후 영조의 유언에 따라 1776년 정조 즉위 후 왕으로 추존되어 영릉이라는 능호를 받고 왕릉으로 격상되었다. 경기도 파주군 조리면의 공릉, 순릉과 함께 파주 삼릉을 구성하는 능 중 하나이다. 효장세자의 첫 무덤이 있던 곳은 이후 능안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9]
1776년(정조 즉위년), 효장세자의 승통을 이은 양자 정조가 즉위하면서 '''진종'''(眞宗)으로 추존되었다. 시호는 '''온량예명철문효장'''(眞宗溫良睿明哲文孝章)이며, 1908년(융희 2년) 대한제국 순종에 의해 '''소황제'''(昭皇帝)로 추존되었다.
3. 2. 추존
1776년(정조 즉위년) 효장세자의 승통을 이은 양자 정조가 즉위하면서 '''진종'''(眞宗)으로 추존되었다. 시호는 '''온량예명철문효장'''(眞宗溫良睿明哲文孝章)이며, 1908년(융희 2년), 대한제국 순종에 의해 '''소황제'''(昭皇帝)로 추존되었다.[3]정조는 즉위식 날 신하들에게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언했지만,[4] 할아버지 영조의 뜻을 존중하여 양아버지인 효장세자를 왕으로 추존하고 묘호를 '''진종'''으로 올렸다. 효장세자의 부인 효순왕후 또한 왕후로 추존되었다.
1899년에는 고종이 소황제로 추존했다.
4. 가족 관계
인물 | 생몰년 | 본관 | 부모 | 비고 | ||
---|---|---|---|---|---|---|
부 | 영조대왕 | 1694년 - 1776년 | 전주 | 숙종대왕 숙빈 최씨 | 조선 제21대 국왕 | |
법모 | 정성왕후 서씨 | 1692년 - 1757년 | 대구 | 달성부원군 서종제 잠성부부인 이씨 | ||
모 | 정빈 이씨 | 1694년 - 1721년 | 함양 | 이후철 김해 김씨 | ||
배우자 | ||||||
추존 왕비 추존 황후 | 효순소황후 조씨 | 1715년 - 1751년 | 풍양 | 풍릉부원군 조문명 완흥부부인 이씨 | 효순현빈 | 조선의 추존 왕후 대한제국의 추존 황후 |
자녀 | ||||||
양자 | 정조 선황제 | 1752년 - 1800년 | 장조의황제 헌경의황후 | 효의선황후 김씨 | 조선 제22대 국왕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
참조
[1]
뉴스
10살 때 요절한 효장세자 사후 양자 정조가 "아바마마"
http://weekly.donga.[...]
The Dongah Weekly
2010-12-27
[2]
뉴스
명당과 풍수 그리고 왕릉
http://www.ohmynews.[...]
Ohmynews
2004-09-24
[3]
웹사이트
인정전 월대에서 친히 향을 전하다. 육상궁에 배알하고 창의궁에 들르다
http://sillok.histor[...]
[4]
뉴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http://www.ohmynews.[...]
Ohmynews
2006-10-13
[5]
서적
왕세자의 책봉례를 행하고 반교하다
1725-03-20
[6]
서적
왕세자의 부스럼으로 의관을 숙직시키다
1725-05-24
[7]
서적
동궁의 환후가 회복되자 종묘에 고하고 사령한 교서의 내용
1725-06-13
[8]
서적
왕세자가 창경궁에서 훙서하다
1728-11-16
[9]
뉴스
조선 초 3대 천도지의 하나였던 안산(鞍山)과 이궁(離宮) 연희궁 터
http://www.pressian.[...]
프레시안
2012-08-30
[10]
서적
세자와 옹주를 매흉한 궁인들을 인정문에서 친국하다
1730-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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